회색
100가지 색종이
(TEST)
색약
색각이상 검사
사실 나는 어릴 적부터 색각이상 검사를 단 한번도 통과하지 못했다. 어느 날은 간호사가 점박이 그림 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이게 안 보이냐, 거짓말 하는것 아니냐” 라며 20분 가까이 붙들린 적도 있었다. 나는 “뭔가 덩어리는 보인다” 라고만 대답했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더 곤란한 상황도 있었다. 교수님이 과제에서 수정할 부분을 표시해 놨다길래 무심코 “노란색 부분이요?” 라고 물었다. 그러자 교수님이 멈칫하며 “노란색? 이건 초록색인데? 너 디자이너인데 색을 못본다고?” 라며 날카롭게 지적하셨다. 당시의 창피함과 당혹감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돈 없는 휴학생 신분으로 동대문 쇼핑몰에서 포토샵 보조 알바를 구했던 적도 있다. 하루는 우연히 보라색 티셔츠를 보고 “파란색”이라고 말했다가 색약인 사실이 들통 나버렸다. 결국 며칠 후, 알바 자리에서 잘렸다.
입대를 준비할 때에는 공군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병영 신체검사에서 색약 판정을 받은 뒤, 공군 홈페이지에서 지원 양식을 작성할 때, ‘색약’ 항목을 선택하자 지원 버튼이 회색으로 비활성화되는 걸 바라봐야 했다. 그날 이후로 색약이라는 나의 특성이 더 이상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제한으로 다가왔다.
100가지 색종이
순서를 외워야 한다
그래서 나는 색을 잘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어했다. 색채 이론을 공부하며 100가지의 빨주노초파남보핑크갈색회색 색종이의 이름을 외우고, 순서대로 나열하는 연습을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노력없이 가능한 것이, 나에게는 그토록 어렵다니. 몇 달간 노력에도 그닥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색을 능숙하게 다뤄야 하는 디자인을 전공하면서 정작 색을 보지 못한다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그저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것일 뿐인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라니. 나는 그런 내 모습이 왠지 낯설지가 않다.
5BG 5/5
대충 이 색이다.
색약인이 보는 색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색과 다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색을 공부하면서 알게된, 내가 유독 구분하지 못하는 색을 소개한다. ‘5BG 5/5’. 매번 이 색을 다른 색종이들과 헷갈리곤 했다. 형광등을 최대한 밝게 켜고, 안경을 벗고, 코앞에 가까이 가져가 대 보아야 그제서야 긴가민가-한 차이가 느껴졌다. 어느 순간 색종이의 귀퉁이가 닳아 있는 모양을 무의식적으로 외워 구분하고있는 내 자신이 속임수를 쓰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에게 이 색이 어떻게 보이냐고 묻는다면, 묘하게 시신경을 긁어주는 회색이다.